라캉을 모르면 막장인가효?(아이추판다)
정신분석학은 심리학이 아닌가?(아이추판다)
정신분석학과 심리학(윤형)
일관성(아이추판다)
정신분석학과 심리학 재론(윤형)
프로이트, 융, 라캉(아이추판다)
라캉위에 그어진 선(아이추판다)
아이추판다님과 윤형님의 토론을 지켜보았다.
과거에 나도 라캉을 읽지 않은 것이 부끄럽지 않다는 글을 쓴 적이 있었는 데 그것은 전적으로 소칼의 폭로와 그에 대한 라캉 진영의 설득력없는 대응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 논쟁 처럼 심리학 전공자가 '라캉은 심리학에서 듣보잡, 임상에서도 무능'이라고 하니 왠지 내가 소발에 쥐잡기로 (라캉을 읽는)시간낭비를 피한 것 같다.
개인적으로 라캉을 이용한 문예비평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하고 싶지 않다. 음양오행을 이용해 한국드라마를 비평하든 '맹자를 이용해 조용필을 해석'하든 그것은 비평가의 자유의사에 속한 부분이다.
하지만 라캉의 이론이 임상에서 탁월한 효과를 보여줬다면 그것이 아무리 난해하다 하더라도 공부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런 이유도 있고, 이번 논쟁을 관전하며 "진짜 라캉이 임상적인 유효성이 있나?"라는 궁금증이 들기도 해 한국라캉학회 - 정식명칭은 '한국 라캉과 정신분석학회' - 에서 출간한 저널을 살펴보았다.
연세대에도 저널이 구비되어있지 않아 dbpia를 통해 온라인으로 확인했는데, 1999년 12월에 발행된 1권 1호부터 2007년 8월의 제9권 1호까지
총 12호 중 단 하나의 논문만이 실제 임상 사례를 다루고 있었다. (연쇄살인범 유영철에 대한 정신분석도 있기는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임상 사례라고 보기 어려운 논문이었다. 읽다보면 논문의 저자가 유영철의 주변인과 직접 면담을 한 것인지도 좀 불분명해보인다. 그리고 이 논문이 웃긴 것은 제목에서는 '유 아무개'라고 해놓고는 본문에서는 '우리 영철이는' 이런 식으로 썼다는 것이다. 저자의 유머이려나?)
위에서 말한 단 하나의 임상 논문은 울산의대 강릉아산병원 정신과의 백상빈교수의 논문인 <영상기법을 통한 정신병 환자의 분석적 정신치료>(2005년 겨울호)인데 아마추어인 내가 읽어도 허술하고 혼란스럽다는 인상을 지울수가 없었다.
이 논문은 잔류형 정신분열병으로 진단받은, 낮병원- 낮병원은 가정에서 통원을 하며 치료 받는 주간 치료 제도를 말한다. 환자의 사회적응에 유리해 기존의 폐쇄 입원 병동을 대체해 가고 있다고 한다. - 을 다니던 31세 남성 환자에게 휴대용 캠코더를 주어 자유롭게 영상을 찍어오게 한 후 치료자가 그 결과를 토대로 만든 분석치료영상물을 보여주는 과정을 반복한 결과를 정리하고 있다. 논문에 따르면 이 과정은 "치료자와 환자 사이에 이미지를 통해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서" 시도된 것이다.
치료 과정을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환자의 1차 자유 영상물 →치료자의 영상 분석 →치료자의 1차 분석 치료 영상물 → 환자의 반복 관람 → 환자의 2차 자유 영상물 → 치료자의 영상분석 → 치료자의 2차 분석 치료영상물 → 환자의 반복관람 → 환자의 3차 자유영상물 → 환자와 치료자의 최종면담"
라깡에 대해 관심있는 분들에게는 매우 흥미로운 내용이기도 할 테니, 해당 논문에서 조금만 길게 인용해보고자 한다.
"환자가 캠코더로 마음대로 찍어온 1차 자유 영상물은 약 20분 가량되는 것으로, 내용 중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었던 특징은 쓸쓸히 길을 걸어가는 노인, 뒷골목에 홀로 앉아있는 남자, 버스 정류장에서 쭈그리고 앉아있는 남자, 벤치에 홀로 앉아있는 여자 등 주로 고독하고 어두운 정서를 보여주는 장면들이었다. 환자의 1차 자유 영상물을 분석한 결과 일단 외면적으로 드러난 그의 정서적 특징을 더욱 강하게 자극한다면 그의 상상계적 무의식이 좀더 활성화 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였다. 이를 위해 국내에 비디오로 출시된 영화들 중에서 고립감과 우울감이 잘 드러난 장면들을 골라 약 30분 분량의 1차 분석치료영상물을 제작하였다. 환자에게 1차 분석치료영상물을 5회 이상 반복하여 시청하게 한 뒤, 캠코더로 2차 자유 영상물을 마음대로 찍어오도록하였다.
환자가 찍어온 2차 자유영상물에서 가장 유의미하게 반복된 내용은 어머니가 자녀들과 손잡고 걷고 있는 장면, 아이가 어머니 품에서 편안하게 안겨있는 장면 등 주로 어머니와 아이, 2자간의 다정한 유대관계가 담겨잇는 것이었다. 또한 여기서 흥미로웠던 점은 이상하게도 아이들의 아버지가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환자 2차 자유 영상물을 그의 욕망으로 중심으로 분석한 결과, 그가 아버지의 배제를 소망하고 있으며, 어머니의 욕망만을 끊임없이 욕망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라깡은 정신병의 경우 '아버지의 이름이 소환되는 지점'에서 '기표의 폐제'가 일어나며 이는 '대타자가 응답하는 구멍'이라고 언급하였다. 즉 이 환자가 어머니의 욕만만을 끊임없이 욕망하고 있는 것은 그가 '아버지의 이름이 폐제되면서 또한 남근 이미지에 의한 주체의 표상이 부재하면서','남근을 소유할 수 없어 어머니의 욕망을 동일시하고 자기것으로 했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생각되었다."
(이후 환자의 과거력 중 아버지와의 불화 언급)
"2차 분석치료 영상물에는 두 가지 서로 상반되는 내용을 담았는데, 하나는 아버지가 아이를 학대하고 괴롭히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어머니가 아이를 따듯하게 사랑해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분석치료영상물의 의도는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환자의 욕망을 보다 확실하게 분리 구분시키고, 이를 각각 더욱 자극 할 때, 그의 상상계적 무의식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라는 가정 하에서였다.
환자로 하여금 2차 분석치료영상물을 5회 이상 반복 시청하게 한 뒤, 캠코더로 마음 내키는 대로 3차 자유 영상물을 찍어오도록하였다.
환자가 찍어온 자유영상물은 전체적으로는 반복된 주제가 없이 다소 지리멸렬하게 느껴졌으며 단지 유의미한 특징으로 생각되었던 점은 어떤 적대감적으로 느껴지는 장면이 짧게 포함되어있다는 것이었다. 3차 자유 영상물에 대한 분석결과, 영상이 지리멸렬해진 것은 환자가 어머니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멈추어있기 때문이며, 아버지의 이름을 도입하는 것은 불가능한 상태에 있고, 그곳에서 더 이상 나아가게 자극을 주면 혼란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생각되었다. 그런 측면에서 매우 짤막하게 등장하는
지하철 안 장면에서 환자에게 적대적인 눈길을 보내고 있는, 한 청년이 등장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아버지로 상징되는 남성에 대한 환자의 적대감정이 투사되어 편집적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으며, 그 상황에서 환자의 상상계적 적개심이 고양되고 있음을 나타내주는 증후라고 생각되었다. "
(제3자가 환자를 바라보는 모습이랑 아버지로 상징되는 남성에 대한 환자의 적대감정이 도대체 무슨 상관인가? ㅋㅋ 실소를 금할 수 없다.ㅋㅋ- 인용자)<중략>
"이러한 실재의 출몰은, 지하철 안에서 자신을 촬영하고 있는
환자를 바라보는 한 외국인 남자의 기이한 눈초리에서 더욱 확실하게 엿볼 수 있다.
호의도 적대감정도 아닌, 의도를 파악할 수 없는 이상한 이 남자의 시선은 그가 외국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더욱 이질적이고 괴이하게 느껴진다. 이것은 환자가 그 시선의 의미를 상징화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며, 구멍을 통해 실재가 출현하는 체험을 하고 있음을 추측하게 해준다."
( 이 대목을 읽으면서 논문의 저자가 외국인에게 거부감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외국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이질적이고 괴이하다니!!! - 인용자)환자는 이후 최종면담에서 자신은 당시 그 외국인을 보고 적대감과 분노를 느꼈다고 말했다. 그런 감정을 느낀 이유는 자신의 정신병이 발병한 원인은 고교시절 자신을 괴롭히던 한 남학생 때문인데, 그 남학생이 지하철의 그 외국인과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환자의 이러한 진술은 마치 슈레버가 자신의 '영혼살해'에 대한 책임을 플레흐지히에 연결시키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써, 부성구조의 부재로 인해 생긴구멍을 메우려는 상상계적인 시도인 것이다. 이렇듯 영상분석적 정신치료의 진행과정중 환자의 상상계적 혼란이 증대됨에 따라 이런 실재의 증후로 추측되는 흔적들이 발견될 수 있음은 흥미로운 일이다. 3차 자유 영상물의 전체적 의미는, 환자가 폐제를 통해 사징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상상계에 머물러있을 수 밖에 없으며 만약 상상계가 과도하게 활성화되어 혼란에 빠지게 되면 정신병적 상태로 전환될 수 있다는 정신병에 대한 라깡의 구조적 진단 방식이 정당하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나는 라깡을 읽지 않았다. 따라서 이 논문에 나오는 '폐제'라든지 상상계,실제계의 의미도 정확히 모른다. 그러니 일단 그런 부분들은 제외하고 상식적인 수준에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을 지적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1) 이 논문은 환자의 자유영상이 환자의 상태 - 무의식? 라깡에 대해 무지한 나는 라깡주의자들이 그것을 뭐라 부르는지 모르겠다 -를 보여주고 있다고 전제하고 있다.
이 논문 말미에 "이미지를 매개로 한 의사소통을 통하여 환자의 무의식과 치료자의 무의식을 가능한 직접적으로 조우"시키기 위해 이 치료법을 시행했다고 부연하고 있는 걸 봐도 그렇다.
그러나
'환자가 찍은 캠코더의 영상이 환자의 <외부>가 아닌 <내부>를,심지어 <무의식>을 담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이 논문은 이와 관련된 근거를 하나도 제시하지 않는다. 예컨대 환자가 찍은 동영상은 객관적으로 '환자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환자가 찍은 3차 영상 중 "적대적인 감정"이 표출되는 장면이라고 지적했던 지하철 안 남성의 시선 과 같은 것은 말 그대로 '그 남성의 감정'이지 환자의 '무의식'과 관련된 어떤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 환자의 무의식과 관련된 것이라기 보다는 도리어 캠코더에 찍힌 남성의 시선을 '적대적'이라고 해석한 치료자의 무의식이 이 논문에 나타난 것은 아닌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1차 영상의 우울해 보이는 노인들의 영상도 마찬가지다.
만약 촬영중 '우연히! 피사체인 노인들이 고개를 들어 촬영중인 치료자를 노려보았다면, 이 논문에 따르면 1차 동영상은 (환자의) '적대적인 감정'을 담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상황, 이 영상이 촬영자와 전혀 무관한 객관적인 현상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즉 이런 해석은 넌센스다.)
환자가 촬영한 영상에 대한 해석이, 환자의 내면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사실은 논문의 저자인 치료자의 무의식 또는 내면의 어떤 것을 반영한 것임을 의심케 하는 대목도 많은데 특히 3차 영상 중 외국인 남자에 대한 대목이 그렇다.
"지하철 안에서 자신을 촬영하고 있는 환자를 바라보는 한 외국인 남자의 기이한 눈초리에서 더욱 확실하게 엿볼 수 있다. 호의도 적대감정도 아닌, 의도를 파악할 수 없는 이상한 이
남자의 시선은 그가 외국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더욱 이질적이고 괴이하게 느껴진다. 이것은 환자가 그 시선의 의미를 상징화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며, 구멍을 통해 실재가 출현하는 체험을 하고 있음을 추측하게 해준다"
와 같은 해석은 전적으로
치료자의 주관적인 해석, 외국인 남자에 대한 치료자의 어떤 의식을 드러낼 뿐이다.
이 논문은 이렇게 환자의 무의식과 객관적으로 환자 외부에 존재하며 우연히 캠코더에 담긴 다른 존재, 그리고 치료자의 주관적 해석이 뒤죽박죽되있는 채로 쓰여 있다.
혹시 치료자는
라캉을 원용하며 영화를 비평하듯이 환자의 영상물을 비평하는 실수를 범한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2) 이 논문이 허술하다는 표현을 피해갈 수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예컨대 이 논문의 가장 중요한 연구 대상은 환자가 찍어온 자유 영상물이다. 그리고 그
자유영상물에 대한 연구자의 해석이 타당한가가 이 논문의 관건이 된다.
따라서
해당 자유 영상물에 대한 정보가 최소한 각 장면과 내용들이 시간대별로 제시되어 논문 작성자의 해석이 타당한가 검증받을 수 있도록 제시되었어야 했다. 이러한 자료 없이 단순히 '주로 ~가 있었다'는 식, 또는 "전체적으로는 반복된 주제가 없이 다소 지리멸렬하게 느껴졌으며 단지 유의미한 특징으로 생각되었던 점은 어떤 적대감적으로 느껴지는 장면" 이라는 식으로 처리해버리면 이 논문은 진지한 토론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이러한 자료에 바탕해, 어쨰서 3차 영상의 대부분을 차지한 '다소 지리멸렬하게 느껴'지는 부분들이 '유의미'하지 않은지 명쾌하게 밝혀야만 했다. 그러나
이 논문은 이러한 기초적인 작업은 제처두고 "라깡의 구조적 진단 방식이 정당하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는 교리 문답으로 직행해버렸다.
3) 또한 환자의 1차,2차,3차 영상물의 변화에 대한 라캉적인 해석이 정당화되려면 다른 해석보다 더 설득력이 있음을 보여야만 할 것이다.
이런 가설을 세워보자.
[환자는 낮병원을 다녔던 사람이다. 그리고 정신분열병으로 신학대학에 휴복학을 반복한 사람이다. 캠코더를 찍은 시간은 낮시간, 장소는 동네 주택가로 이 시간대와 장소에는 주로 직장에 다니지 않는 노인과 여성, 아이들이 다닌다. 1차 영상을 제작할 당시에는 캠코더에 익숙치 않아 촬영이 용이한 정지한 피사체 즉, 고독해 보이는 노인이나 버스 정류장에 웅크린 아주머니를 찍었다.
그러나 2차 영상물에서는 보다 익숙해져서 시장 어귀, 마을버스 등에서 촬영을 했다. 따라서 주로 여성과 어린이들이 찍혔다. 이 영상에 남성이 찍히지 않을 확률이 높다는 것은 당연하다.
3차 영상을 찍을 때는 이제 캠코더로 찍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지하철에서조차 사람들의 얼굴을 대놓고 찍는다. 지하철에서 촬영하자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본다.]
이 가설에 기반한 해석이 라캉적인 해석보다 훨씬 그럴 듯 하다.
물론 두개의 해석들 사이에 우열을 따지려면
환자의 동선, 촬영 시간, 장소 등에 대한 면밀한 자료가 제시되어야 한다.
심지어
요일이나 날짜에 따라서도 피사체는 달라질 수 있다.
1차와 2차는 평일의 낮이기에 한산하고, 성인 남성이 없는 장면만 담겼을 가능성이 있다.
3차 영상은 주말이나 공휴일에 촬영되어서 성인 남성들이 많이 찍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러한 외부적 요인들을 모두 제외하고,
영상의 미묘한 변화가 환자의 상태를 반영한 것이라 속단할만한 정당한 근거가 없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이러 저러한 이유로 라깡학회지의 유일한 임상 논문에 대해서 그다지 신뢰감을 가질 수는 없었다. 또한 논문의 제목은 <영상기법을 통한 정신병 환자의 분석적 정신
치료> 임에도 불구하고 이 논문에서는 영상기법을 통해
실제로 '치료'한 것은 없다는 면이 실망스러웠다는 것도 말해야 겠다.
정리하자면 한국라깡학회의 저널을 구경해보니 라깡을 이용한 임상적 실천이라는 것이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유일한 임상 논문 - 그것도 대형 병원의 정신과 교수님이 쓰신 - 도 기대에 못미치게 허술하며 엉뚱하게 씌여져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현재로서는,
당분간 라깡이나 라깡에 대한 책을 굳이 찾아서 읽지는 않을 것 같다. 이러한 분위기를 반전시킬 어떤 놀라운 연구결과가 나오기 전에는 말이다.
* 다시 읽어보니 이 논문에 '아전인수'격인 해석들이 너무나 많음을 재발견하게 되었다. 이런 논문이 실리는 저널이라면, 나라면 특별히 시간을 할애해 읽고 싶진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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